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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중국 마케팅 돋보기 (25)] ‘차이나는 차이나’ 트레이드 시대 넘어 마케팅 시대로

또 다른 차이나(差異那), 이병효 박사의 중국 이야기5

 

동북아시아에서 한국과 중국의 상호 간 협력과 경쟁을 날로 증가하고 있고 한중 간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 관계 또 복잡하고 밀접하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사드 배치의 영향으로 한중 간 제반 관계가 정체된 시기도 있었지만 한국의 정권교체와 북한의 비핵화 움직임 등이 맞물려 중국과의 관계도 또다시 변화하고 있다. 1995년부터 20여 년을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진행한 김창용 사임당화장품 전무는 그동안 체득한 경험들을 시리즈로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난 한중 관계를 되새겨 보고 이를 통해 향후 화장품 업계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코스인코리아닷컴 김창용 편집위원] 본의 아니게 여러 회사를 거쳐 왔다. 고문 역할을 했던 3개 회사를 제외하고도 4개 회사나 된다. 솔직히 창피하다. 능력이 부족해서 떠돌아다닌 것 같고 돌아가신, 이 세상에서 너무나 사랑했던 우리 아버지의 훈육, ‘한 직장에서 오래 다니라’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다.

 

또다시 다니고 싶은 회사와 두 번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회사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을 남 보기에 번듯한 행정직 고위 공직자가 아니라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공무원 생활을 하신 분이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정말로 눈물 나게 고맙고 사랑스러운 분이셨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근무한 4개 회사 중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부담을 덜어주고자 과감히 나온 회사가 2곳이 있다. 그 중에 진심으로 화장품 인생의 경험을 도와주고자 덤벼들었던 선배 회사의 배신을 빼고, 중국에서 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직장생활을 했던, 북경에 있는 한국지사에서의 근무 경험은 돌이켜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생각만 하면 술로 분을 달래고 싶은 심정이다.

 

나의 첫 직장은 국내 화장품 업계의 선두인 A회사다. 1993년 입사 당시에는 T사로 불렸고 A사로 사명이 바뀐 곳이다. 이곳은 화장품 업계에서의 사관학교라고 불리는 곳이다. 나 역시 A사에서 근무했다는 것을 퇴사하고서야 너무 자랑스럽고 고맙게 여기고 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화장품 업계는 물론 이종업계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대다수가 긍정적이다.

 

18년 정도 근무했던 것 같다. 정말 A사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많은 것을 배우게 해줬고 나를 무르익게 만들어 준 곳이다.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CEO인 S회장님이 계신다. 나와 정확히 2살 터울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보는 시야가 다르고 그 깊이가 다른 분이다. 기업 경영, 마케팅, 브랜드, 영업 등 화장품업계는 물론이고 그 이외 업종에서도 말이다. S회장님은 독서광이다. 덕분에 인생사는 동안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아니, 그 이후로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얼마나 좋은 회사인가. 강제로 책을 읽게 했다 하더라도 나에게 삶의 지식의 보고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잘 몰랐던 사항이다. 사실 정말 읽기 싫은 책을 S회장님으로부터 의무적으로 독서하게 됐을 때 투덜거렸던 것이 너무나 즐거운 추억일 될 줄이야.

 

군대를 제대하고 A사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첫째는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던 우리 집안에 장학금이라는 선물을 통해 삶의 희망과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 봉사와 베풂의 정신을 베풀어 준 곳이 A사였다. 우리 작은누나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공부를 꽤 했는지 장학금을 매년 받았던 것이다. 공무원 박봉에 힘들어한 우리 가족에 정말 큰 도움이 됐다.

 

그런 인연인지 A사에 합격되고 나서 너무 기뻤고, 입사 후에 모든 제품은 A사의 제품을 썼다. 화장대는 물론 생활용품이 있는 화장실, 그리고 녹차가 있는 냉장고까지 모두 A사로 도배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모두 강제적으로 바꾸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던 애사심 많은 열혈 청년시절도 있었다. 당시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에게도 모조리 A사 제품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오죽 했겠는가.

 

부서를 옮기면서 해외 유통을 파악해야 하는 나에게 해외의 많은 시장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A사 이외에서는 경험한 적이 없었으니 그 얼마나 감사한 시절이었던가? 또 무능한 나에게 특별승진을 통해 화장품의 메카인 명동시장의 팀장을 맡겨 준 것도 그 얼마나 영광이었던가.

 

아무튼 이러한 회사에서 18년을 근무하다 한순간의 자존심과 욕심 때문에 이직을 하게 됐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이 됐다. 번째 직장을 옮기게 된 이유는 제조업체 경험을 통해 향후 화장품 업계에서 굵직한 거목으로 이름을 남겨 보려는 욕심과 당시 상사 임원에 대한 서운한 감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ODM 화장품 제조업체인 K사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나의 한숨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다가왔다. 기업 문화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른 곳에서의 생활은 참담했다. 사실 첫 직장이 있는 곳으로 수차례에 걸쳐 와 달라는 임원진의 정성에 감탄했던 것도 이직의 사유가 됐는데, 이직과 더불어 ‘잡은 물고기에 먹이는 주지 않는다’는 속담을 그대로 경험하게 됐다.

 

같은 경쟁업체인 C사로 간 전 직장 동료들의 직장 내 분위기, 지원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대학교 때 딱 한 번 피우고 쓰러질 것 같아 버렸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물론 나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외부에서 영입돼 온 직원에 대해 생색만 냈지 같이 회사에서 역할을 해 주게끔 하는 전반적인 정책과 마인드가 경쟁업체인 C사와 너무 비교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있든 없든 간에, 아버지의 성실함과 어머니의 끈질김을 배운 터라 열심히 생활했다고 생각한다. 서울 본사에서 마케팅 임원을 맡아 일하던 중에 중국 비즈니스 확대를 위해 중국 지원을 위한 직원들의 중국어 교육을 한다는 소식에 두 손 들고 신청을 했다. 임원은 나 한 사람, 직원들 몇 명, 그런 이유가 회사의 발전을 위해 중국에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 직원 교육비를 준 것도 아니고 중국어 강사 한 명이 아침마다 발음부호부터 시작하는 정말 빈약한 교육이었을지라도 나도 좋지만 회사를 위해서 배움을 시작했다. 이런 의사 결정 역시 항상 책을 옆에 끼고 생활하던 첫 직장 A사의 S회장을 조금이라도 닮아 가려고 했나 보다.

 

아무튼 이렇게 중국어를 2개월 정도 배웠던가? 갑자기 중국으로 회사에서 발령을 냈다. 복합적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좋은 기회라는 점과 내가 일을 못해서인가라는 고민스러움이 겹쳐지는 상황 속에서 내게 스카우트를 제안해 K사로 오게 한 임원께서 마지막 기회라는 말을 던지면서 중국 생활 잘해 보라고 했다. 마지막 기회? 내가 뭐를 잘못했나? 참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자존심이 강한 나로서는 그만둘까 하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를 바라보고 사는 어린 두 자녀와 나의 아내, 그리고 부모님들의 눈을 생각하니 오기가 생겼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심정으로 중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혹시 회사에서는 내가 중국으로 가지 않고 퇴직을 결정하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회사에서 기대하는 방향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요청했다. 이사비과 체제비에 대해. 이사 비용은 없단다. 단독 부임이 회사의 조건이란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욕 나올 뻔했다. 그 이야기를 한 인사담당 임원은 내가 마케팅을 담당할 때 사사건건 부딪쳤던 장본인이다. 나중에 정말 지겹도록 싫었던 회사에서 나오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불미스러운 금전사고 등의 이유로 퇴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임원은 그렇게 K사의 Y회장님이 신뢰하는 가신이었다.

 

아무튼 이사비도 없다고 하고 체제비는 일부만 준다고 하더라도 가족과 같이 가겠다고 했다. 이유는 한 가지다. 개인적으로 A사의 해외 파견 근무자들은 당연히 가족과 이동을 하고 이주비 등의 지원을 대기업 삼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더라도 열심히 회사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본부터 도와주는 패턴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었다.

 

왜 혼자 가게 했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가족과 같이 중국으로 가서 중국에서의 성과를 크게 내 보려는 순진한 아니, 멍청한 생각만 했을 수도 있다. 회사의 속뜻은 전혀 모르고 말이다. 그렇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나와 K사는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지 않아서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고, 또 누가 입사하겠다고 하면 쌍수 들고 막을 회사가 됐다. 비교하면 A사의 천국과 K사의 지옥을, A사의 퇴직과 함께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 왜 내가 이런 생각들을 갖게 됐는지 한 가지씩 언급하려고 한다.

 

영업은 현장 지향적이고 탄력적인 조직이어야 한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깨끗한 이미지의 기업인 P사에서 사업부장을 할 때였다. 신규 사업부였기 때문에 많은 전략과 전술이 현장에 적합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은 중국 북경에서 근무하던 패턴과 너무 다른 CEO와 관리임원의 모습이었다. P사 역시 총괄 CEO이신 Y대표님의 경영 철학이 A기업의 S회장님과 비슷했다.

 

신규 사업을 책임지는 J대표님은 모든 권한과 책임을 내게 부여하고 믿음을 주셨다. 영업은 항상 현장 지향이라는 지침은 나의 생각과 딱 맞았다. 운이 좋았던가? 관련된 일들이 술술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흔들렸던 내부 조직이 안정화됐다. 신방판 시스템인 관계로 판매원 확보가 사업의 중요한 키이기에 최대한 전략과 전술을 집중한 것이 성과를 낸 것이다.

 

실적도 연이어 매월 20∼30%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 J대표님은 뒤에서 시스템 쪽 지원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정확한 사업판단이었다. 방판에서의 시스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현명한 방향성 때문에 사업부장인 나는 영업과 마케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J대표님이 정년으로 물러나셨지만, 배턴을 연이어 넘겨받아 대표가 되신 Y대표 역시 똑같은 패턴으로 신뢰를 부여해 주셨다. 그만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영업과 마케팅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더 열정을 짜내고 조직원들과 함께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우리 와이프가 알면 큰일 날 일이고 그동안 아무에게도 노출하지 않았지만 내 개인적인 사비 500만원을 들여 방송국 PD에게 부탁하면서 PPL 광고와 지하철 광고까지도 시행했다.

 

이것은 내가 잘난 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전적으로 나를 믿고 신뢰해 준 대표님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사업은 시작 때의 혼돈을 깨고 점차 안정화 추세로 나아갔다.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접목하는 사업 시스템이고 품목이다 보니 생소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다.

 

안타깝게도 관리하시는 대표가 또 다른 Y대표로 바뀌어 정책이 관리 집중으로 바뀌다 보니 2년간 힘들게 올려놓았던 현장에 적합한 영업전략이 많이 축소돼 사업이 주춤하게 됐지만, 그래도 처음 함께 한 J대표와 Y대표께는 너무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화장품 ODM 영업은 철저하게 고객 마인드 관리해야

 

2월 8일 상해의 한 거래처에서 일정 시점에 납품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사항을 공장 쪽에 전달해 상해까지의 배송 일정을 맞춰 생산 후 미생물 검사를 한 뒤에 바로 출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못 맞춘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유는 3시 이후에는 출고하지 말라는 공장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금요일 3시 이후에 출고를 해야 겨우 도착하는 타임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월요일 출고가 돼 약속된 기일보다 2일이 늦어지게 되므로 고객사로부터 클레임을 받을 게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공장장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꼭 출고를 해 주십사 요청을 했다. 그러나 3시 이후에 출고하지 말라는 것은 예전부터 예고된 지침이라는 출고를 할 수 없단다. 규정을 준수하라고 역으로 역정이었다. 정말 임원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하는 수 없이 고객사로부터 욕을 한 번 더 먹기로 작정했다. 못하는 중국어를 핑계 삼아 부하오이스만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처참한 하루다.

 

고가격의 토탈 서비스, 턴키 서비스 영업구조 필요

 

중국에서 화장품 B2B 비즈니스를 수행하기 위한 조건은 당연히 영업이익, 순이익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가격 경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 중국에까지 가서 가격 경쟁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연구개발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할 것이며, 또는 능력 있는 직원들의 간접비까지 감안하면 말이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상품 개발부터 부자재, 디자인까지 아우르는 Total Service, Turn Key 영업구조가 필요하다.

 

중국인은 한국 화장품에 대한 신뢰가 분명히 있다. 마치 국내에서 화장품 시장 개방 당시 프랑스의 L사 제품에 대해서는 L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믿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상품 제안 시 중국 기업들이나 일본 기업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접근해서 제안해야 하고 부자재의 선택, 품질 관리 등을 통해서 제조 공정에 대한 신뢰 부여와 고품질 관리 수준 인식을 제공해야 한다. 더불어 제품에 대한 용기, 패키지 디자인의 컨설팅, 제공을 통해 한 번 더 한국 화장품 기업의 고품질 인식을 부각시켜서 고부가가치 산업군으로 운영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화장품 B2B라 함은 10원∼20원 생산 인건비를 네고해 가며 견적가를 산출하는 경쟁 구도인데, 중국에서는 개당 100원∼200원의 높은 수익 확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게 함으로써 쉽게 무너지지 않는 한국 화장품 노하우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에 걸맞은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서비스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중국에서 영업을 할 때, 중국 고객사와의 에피소드가 있다. 항주의 L기업은 화장품 시장이 확대되는 것을 보고 찾아와 화장품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화장품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니 모든 것을 맡아 달라는 식으로 요청을 했다. 이미 중국 화장품 시장의 현황 등을 분석해 잘 알고 있는 터라 투자 자본금의 규모와 판매하고자 하는 유통처를 확인하고서 일사천리로 상품 제안을 진행했다. 물론 초기 비용을 받고서 말이다. 일단 초기 비용을 받고 나면 고객사는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 된다. 무조건 믿고 맡길 수 밖에 없는 처지기 때문에 일단 사업 진행의 ‘공’은 우리에게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고객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진행하다 보면 신뢰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 로컬 업체와 확연히 다르다는 인식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품질 면에서 더욱 엄격히 해 다소 시간과 비용이 더 들더라도 엄격함을 유지해야 지금 당장 난처하더라도 향후에 더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반드시 정상적인 계약서를 통해 중간 중간 투입된 비용은 반드시 받고서 다음 스텝을 밟아 나가야 한다. 이런저런 사유를 들면서 유야무야 해당된 정산 문제를 무시하고 넘어가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됨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항주의 L기업은 중국 로컬 기업에 맡겼을 경우에 발생되는 비용이 처음에는 더 적었을 것으로 여기겠지만 실상 진행하다 보면 품질 문제 등으로 인해 더 많이 발생될 수 있는 사항들을 실제 사례로 보여 주면서 전개했고 완벽한 상품 생산으로 현재도 백화점 유통을 통해 확실한 업계에서의 네임 밸류를 확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당연히 당시에 내가 몸담았던 K사는 높은 매출에 높은 이익을 가져갔음은 물론이고, 지금도 해당된 L사에 지속적인 상품 공급과 상품 라인 확장을 하고 있는 터라 무척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가져갔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창용 사임당화장품 전무

 

프로필

(전) 뷰티화장품 부사장, 토니모리 해외사업 부문장, 한국무역협회 해외 마케팅 자문위원, 코리아나화장품 중국 천진법인 총경리, 웰코스 화장품사업부 이사, 아모레퍼시픽 중국 심양법인 총경리, 아모레퍼시픽 중국지역 연수(중국 강소성 쑤저우대학), 아모레퍼시픽 영업부문, 마케팅부문, 기획부문

 

이병효 박사

 

광운대 국제통상학과, 서강대 MBA 마케팅전공(석사), 서울벤처대학원 경영학전공(박사), 아모레퍼시픽 인재원, 마케팅, 영업 등을 두루 섭렵, 화장품 ODM 기업의 국내, 중국 영업·마케팅 임원 역임, 풀무원 더스킨 사업부장 역임, 뉴앤뉴 화장품 ODM 임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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