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인코리아닷컴 김세화 기자] K-뷰티의 글로벌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화장품 수출 기업들이 직면하는 대외 리스크도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제품 경쟁력과 유통망 확보가 해외 진출의 핵심 과제로 꼽혔다면, 이제는 국제 제재와 수출통제, 금융 규제, 거래처 검증, 현지 규제 대응 등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23일 대한화장품협회는 ‘미국 시장 진출 및 글로벌 수출 화장품 기업을 위한 제재·수출통제·거래처 리스크 관리 실무’ 웨비나를 개최하고, 글로벌 수출 환경 변화에 따른 주요 리스크와 대응 전략, 계약 및 규제 관리 실무 등을 공유했다.
이날 연사로 나선 태상철 생크션랩(SanctionLab) 선임 컨설턴트(미국 뉴욕주 변호사)는 글로벌 로펌과 연구기관 등에서 국제 통상 및 경제안보 분야 실무 경험을 쌓아 온 전문가로, 현재는 현재 기업들의 해외 거래 리스크 관리와 제재·수출통제 대응 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 좋은 바이어보다 안전한 거래처를 찾는 것이 중요해져
강연을 시작하면서 태 변호사는 “많은 기업이 ‘전략물자나 군수품이 아닌데 왜 제재와 수출통제를 신경 써야 하나 생각하는데, 최근 수출 분쟁의 상당수는 제품 품질 문제가 아니라 거래처 검증 부족, 계약서 미비, 규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며 “화장품 기업들도 이제 무역 컴플라이언스를 핵심 경영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간 갈등, 대(對)러시아 제재,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불안 등으로 글로벌 무역 환경이 급변하면서 화장품 기업 역시 국제 제재 체계와 금융 규제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과거에는 좋은 바이어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래 상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거래 상대방뿐 아니라 최종 판매 국가와 최종 사용자(End User), 자금 결제 구조까지 확인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국내 한 화장품 기업은 아랍에미리트(UAE) 바이어와 정상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선적까지 완료했음에도 잔금을 받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 조사 결과, 미국 달러 결제 과정에서 중계은행(Correspondent Bank)이 거래를 보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은행은 최종 판매 국가, 최종 사용자, 중동 유통 경위 등에 대한 상세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고, 해당 기업은 수개월간 소명 절차를 거친 끝에 대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태 변호사는 이 사례를 소개하며 “제재 위반 사실이 없더라도 중계은행이 해당 거래를 의심 거래 또는 위험 거래(Red Flag)로 판단할 경우, 자금이 일시적으로 동결될 수 있다”며 “계약 상대방 정보와 최종 판매 국가, 최종 사용자, 유통 경로는 물론 대금 흐름과 물류 흐름의 일치 여부까지 사전에 문서화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 사전에 분쟁 예방하려면 계약서부터 꼼꼼하게 살펴야
이날 강연에서는 화장품 기업들이 해외 거래 과정에서 빈번하게 겪는 분쟁 유형이 소개됐다. 대표적으로 ‘High Quality’, ‘Premium Quality’와 같은 모호한 품질 표현으로 바이어가 제품 수령 후 잔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소개됐다.
독점 총판 계약 이후 최소 구매 수량(MOQ)을 명확히 정하지 않아 제조사가 재고 부담을 떠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OEM 제품의 리콜 발생 시 폐기 비용, 물류비, 보험 처리, 법적 책임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 명확히 규정하지 않아 갈등이 발생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보고되고 있다. 이 외에도 환율 변동과 송금 수수료 분쟁, 계약 상대방이 아닌 제3자 명의로 대금을 지급해 금융기관의 심사를 받게 되는 사례 역시 주요 리스크로 제시됐다.
태 변호사는 “대부분의 화장품 기업이 이미 이러한 잠재적 위험을 안고 해외 거래를 진행하고 있다”며 “문제가 발생한 이후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예방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법원은 모호한 표현에 대해 엄격한 해석 기준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어 계약서 작성 시 품질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제품명과 규격, 시험 기준, 품질 기준, 불량 허용 범위 등을 객관적으로 명시하지 않을 경우 분쟁 발생 시 해석의 여지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기업 간 거래에서 품질 기준을 구체적으로 기재하지 않아 분쟁이 발생한 사례도 소개됐다. 미국 측은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만을 근거로 책임을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이 상당한 비용 부담을 떠안게 됐다는 설명이다.
계약서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핵심 조항으로는 △제재 준수(Sanction Compliance Clause) △재수출 금지(Re-export Clause) △계약 해지(Termination Clause)를 제시했다. 먼저 제재 준수 조항은 거래 상대방이 국제 제재 대상과 거래하지 않으며 제재 위반 목적으로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는다.
재수출 금지 조항은 판매자의 사전 승인 없이 특정 국가로 제품을 재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최근에는 UAE, 터키, 홍콩 등 제3국을 거쳐 다른 국가로 우회 수출되는 경우가 있어 수출 기업의 관리 의무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계약 해지 조항에서는 대금 연체, 최소 구매 의무 미달, 계약 위반뿐 아니라 제재법 위반 의심이 있는 경우 계약을 종료할 수 있도록 규정해야 한다. 태 변호사는 “계약 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계약 종료 조건”이라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기업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미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미 FDA는 승인 아닌 '등록'. 라벨링·마케팅 문구도 점검해야
국제 거래에서는 관할권(Jurisdiction)과 준거법 설정도 중요한 변수로 꼽힌다. 상대국 법원에서 재판을 진행할 경우 자국 기업에 유리한 판단이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태 변호사는 “불가피하게 상대국 법을 적용하더라도 분쟁 해결 기관은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제3국의 국제중재기관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미국과 유럽의 화장품 규제 체계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미국 FDA의 화장품 규제 현대화법(MoCRA)은 제조업체의 자율 책임을 기반으로 운영돼 시장 진입 장벽은 낮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제조사가 직접 법적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반면 유럽은 CPNP(Cosmetic Products Notification Portal)를 중심으로 제품정보파일(PIF), 안전성 평가(CPSR), 책임자(RP) 지정 등을 요구하는 사전 검증 체계를 운영하고 있어 시장 진입 전 준비해야 할 절차가 상대적으로 많다.
태 변호사는 특히 “많은 기업이 ‘FDA 승인을 받았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며 “대부분의 미국 수출 화장품은 승인이 아닌 등록(Registration)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MoCRA에 따라 기업은 시설 등록과 제품 등록, 이상사례 보고 체계 구축, 제조기록 관리 등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이를 소홀히 할 경우 사후 규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라벨링 관리의 중요성도 강조됐다. 태 변호사는 “라벨은 제품의 또 다른 이력서”라며 “소비자가 제품의 용도와 특성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일관되고 명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제품 전면 표시(PDP)에는 소비자가 용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품명을 표기해야 하며 순 내용량은 g·mL뿐 아니라 oz, fl oz 단위도 함께 표시해야 한다. 또한 제조사와 유통사 정보는 실제 계약관계와 일치해야 하고 전 성분은 INCI(국제화장품성분명) 기준에 따라 함량 순으로 기재해야 한다.
또 'Whitening', '세포 재생', '여드름 치료' 등 의약품 효능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은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SPF 자외선차단제는 미국에서 OTC 의약품으로 분류되는 만큼 별도의 규제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제품 포장에 기재된 문구뿐 아니라 웹사이트와 SNS, 브로슈어, 카탈로그 등 온라인·오프라인 마케팅 자료 역시 FDA 점검 대상이 될 수 있어 동일한 기준으로 관리해야 한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태 변호사는 화장품 기업들도 조직 규모와 관계없이 영업·법무·품질·재무·물류 부서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컴플라이언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래처 실사와 계약 검토, 라벨링 및 규제 적합성 점검, 대금 결제 구조와 물류 경로 관리가 특정 부서만의 업무가 아니라 기업 전체가 함께 관리해야 할 과제라는 설명이다.
특히 이메일과 메신저 대화, 계약 내용, 거래 기록 등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문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향후 은행이나 규제기관, 법원 등으로부터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받을 경우,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태 변호사는 “거래처 실사와 최종 사용자 확인, 계약 내용의 문서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컴플라이언스를 영업을 제한하는 규제가 아니라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투자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화장품 기업도 이제 품질 경쟁력만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는 시대”라며 “거래처 검증과 계약 관리, 규제 대응을 포함한 무역 컴플라이언스 역량이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웨비나 말미에는 지식재산처 김가현 사무관이 'AI 위조상품 감정지원 시스템'을 소개했다. 이는 AI 기술을 활용해 온라인 오픈마켓에서 유통되는 위조상품 의심 사례를 탐지하고, 브랜드사의 정·가품 감정 정보를 기반으로 위조상품 대응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K-브랜드의 온라인 유통 질서를 보호하고 상표권자의 피해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AI 위조상품 감정지원 시스템 개념도
김 사무관은 "최근 해외 시장에서 K-브랜드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위조상품 유통과 지식재산권 침해 위험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며 "기업들이 수출뿐 아니라 브랜드 보호 전략까지 함께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AI 기반 모니터링과 현지 분쟁 대응 지원 등을 통해 우리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과 지식재산 보호를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행사를 주관한 대한화장품협회는 “이번 웨비나가 국내 화장품 기업들의 해외 진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리스크를 사전에 점검하고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글로벌 수출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실무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강연 내용은 추후 대한화장품협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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